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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 You've got mail... (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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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광호 작성일02-01-30 12:59 조회6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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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브 갓 메일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인 노라 에프런이 감독을 맡고,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열연한
'유브 갓 메일'이란 영화, 보셨나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지요.
얼굴을 볼 수 없기에 대담해질 수도 있고,
상대방을 모르므로 솔직해질 수도 있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대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호기심이라도 가져본
현대의 풍속도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와 유사한 일이 제게도 일어났습니다.


지난(작년) 6월의 어느 날입니다.
회사에서 작업중인 컴퓨터 모니터에 '새로운 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라는 알림창이 뜨더군요.
우편함을 열어봤습니다.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발신자는 '요세피나'라는 사람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가를 찾듯이 그렇게 모두들 애타게 비를 기다리는데
하늘은 정말 무심하군요.
그래도 오늘은 서울지방의 체면을 세워주기라도 하듯
비가 대지를 조금 어루만져주는군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제가 누군지 궁금하시나요?
님은 좋은 글을 참 많이 올리시더군요.
마음이 참 따뜻하신 분 같아요.
당연히 결혼은 하셨겠죠?
결혼을 하셨다면 부인이 행복하실 것 같네요
그렇게 따뜻하고 아름답고 진솔한 글을 쓰시는 분은
부인의 마음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위해주실 것 같습니다.
직장이 한국전력 이신가봐요?
이제부터 제가 자주 편지를 보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곧 답장 기다릴께요.
미남아저씨 건강하세요


전 한참을 고개를 갸우뚱 거렸습니다.
저는 가끔 신변잡기를 적어서 이곳 저곳 인터넷의 게시판에 올리기 때문에
종종 아는 척을 해오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글은 처음이었거든요.
답장을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그렇고.....
해서, 아주 짧게 답장을 했습니다.


어디에서 제 글들을 읽으셨는지요?
저는 한전에 근무합니다만...
앞으로 정말 편지를 하시겠습니까?


그리고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9월 12일, 또 다른 편지가 온 것이었습니다.
발신자는 '요세피나'에서 '코스모스'로 바뀌었지만 동일인임을 알아채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부는 서늘한 바람이 여름 내내 지친 마음을 풀어 주는 요즘,
건강히 지내고 계시겠지요
저요?! 언젠가 한번 좋은 글이 있어 보낸 적이 있고,
님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늘 관심있게 지켜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 마시길 바랍니다.)
매사에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내기도하지만, 님의 건강을 염려하기도 하는 사람이지요.
가끔 글을 보내도 될까요?
나 혼자 누리는 소중한 기쁨을 소망해도 될까요?
오늘은 이만 할께요.


여기까지 상황이 오자 제가 당황되더군요.
도대체 어떤 여자가 이런 장난을 하는 것일까?
이건 분명히 장난이겠지?
아냐, 혹시 정말로 누가 나를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이거 잘 못하면 소위 말하는 불륜으로 발전하는 거 아냐?
손해볼 것 없는데 그냥 사귀어봐?
많은 생각이 다 들더군요.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되도록 차분하게 답장을 적었습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읽기만 하고는 정신없이 바빠서 덮어버렸거든요.
편한대로 하세요.
어차피 코스모스님의 마음은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저를 모니터링 하신다면 제가 가끔씩 잘 못 나가면...팁 좀 주세요.
'어? 그건 아닌데...'라고요.
뉘신지 모르는 분에게 답장을 쓰려니 좀 어색하군요.
하긴,
모르는 사람에게 쓰는 글이 더 편하고 유려할 수도 있겠지만, 쩝!


이 답장은 짧았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 줄의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정중함을 내보이는 것이고요
다음 줄 '정신없이 바빴다'는 것은
제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당신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표현이며
그 다음의 '코스모스님의 마음은 제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표현은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세련된 표현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계속 나를 좋아하든 말든 하시라는 것이며
또 '모니터링' 이나 '팁'이라는 외래어를 쓴 것은 은근히 유식함을 비치는 것이고
맨 끝의 '쩝!'이란 표현은 요즘 젊은이들의 상용어구로서
저도 무척 젊은 신세대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비록 무표정, 무신경을 가장한 짧은 편지였지만 제법 머리를 쓴 답장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 또 편지가 왔습니다.


빠르게 또 몇 주가 지나갔네요.
(중략)

안녕하시지요?
늘 바쁘신 것은 알지만,
그 속에서도 삶을 즐기신다는 것 알지요.
아마도 그게 님을 지탱시키는 힘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라톤 하시지요?
10월에 있는 춘천 마라톤 대회도 참가하시겠지요.
전 운동엔 거의 소질도 흥미도 없지만,
요즘들어 마라톤에 관심을 갖고 열을 올리고 있는 가까운 사람 덕에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주로 보고 즐기는 쪽으로만.
그래서 그때 함께 따라 나서서 관광도 하고
그 유명한 춘천 막국수도 먹어보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실례),
기대가 컸는데... 같이 사는 사람이 혼자만 가려나봐요.
그곳에 가면 뭔가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혼자만 간데요.
멀리서나마 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잃었네요.
연습 많이 하셔서 좋은 기록 내세요.
그전에 즐거운 명절되시고요.....


이 편지를 보고나서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연치고는 너무 진한 우연이다라는 생각과
혹시 이 사람이? 아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치더군요.
그래서 아이피 어드레스(IP Address)를 추적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만,
답장을 쓰기가 굉장히 망설여지더라구요.
사실 제가 마라톤을 무척 좋아해서 춘천마라톤에도 출전신청을 했었고
다른 마라토너들과 전세버스로 다녀올 요량으로 제 표만 구입한 상태였거든요.
이건 상황이 너무 흡사해서 답장을 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랬더니 함 참 후에 다시 편지가 왔어요.


오늘 외출했다가 깜짝놀랬어요.
가끔 보던 하늘인데, 새삼 하늘색이 너무 곱고 이쁘더라구요.
내 좋은 사람만나 알콩달콩(?) 사느라고 무심했었나봐요.
저 누군지 아시지요?
멜 기대했었는데, 저만의 one-way-love 인 것 같네요.
저요,
이제 겨우 찌든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님에게 이런 마음도 전할수 있구요.
당신은 나의전부
나 당신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당신의 기쁨, 위안은 되고싶어요.
당신 사랑해요
이 가슴떨리는 사랑의 말이
항상 당신 곁에 머물며
당신에게 힘과 용기가 되길 바래요
당신 사랑해요


아이고... 이건 어찌해야 할 지를 모르겠더군요.
한편으로는 아내일 것이라는 확신도 들어갔지만, 그래도 조심스럽잖아요?
본인이 밝히질 않았는데 어떻게 '당신 내 와이프지?' 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심사숙고하여, 고심 끝에 다음과 같이 답장을 하였습니다.
한껏 점잖게요.


무슨 일이든 도가 지나치면 안되는 거예요.
도가 지나치다...무슨 뜻인지 아세요?
세상사는 절도를 지킬 때,
제약에 순응할 때 오히려 의미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굳이 님의 행동을 탓할 입장은 아니지만
지나친 비약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는군요.
더구나 제게서 무슨 회신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좋은 계절에 아름다운 나날을 영위하시길 바라며...


아, 그랬더니 바로 답장이 오더군요.
역시 아내였습니다.


우광호씨!
치수 아빠! 저예요, 치수엄마 ㅇㅇ!
당신 놀랬지, 어쩜 벌써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나 당신 보면서 표정 관리하느라고 정말 힘들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 참느라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말 즐거웠는데..
그냥 모르는척 받아주지 그랬어?
처음 멜 보내면서부터 나 당신과 처음 시작하는 기분이었어.
우린 연애기간도 길지 않았잖아. 그래서인지 얼마나 가슴이 설레였는데...
내 아이디 *******. 별명 코스모스.
86년 4월 5일은 우리 결혼기념일이고
코스모스는 내가 좋아하는 꽃으로 당신이 이미 알고 있고 .
조금만 유심히 봤다면 금방 알 수있었겠지만,
난 몰라 주기를 바랬다. 아니 모르는 척 해주기를 바랬지.
왜?
재미있잖아.
그래서 한 일년 쯤 있다가 모르는 척 만나는거야.
부부가 때론 불륜처럼...
암튼 김샜어!
솔직히 당신은 어땠는데?
말 안하겠지!!!!!!
학교 잘 다녀 와,
수업시간에 딴 생각말고....

당신의 아내 ㅇㅇ으로부터..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과 안도감이 밀려오더군요.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아주 조금 들긴했지만 그리 크지 않았구요.
대신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결혼 16년째이지만 아직도 '여보'라고도 불러본 적이 없을 정도로 표현이 부족했었거든요.
후배들은 제 아내를 '이조시대 여인'이라고 평하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당당하게 '사랑한다'고 메일을 보내다니... 대단한 발전입니다.
연신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마지막이 될 답장을 했습니다.


누가 끝내래?
당신이 먼저 밝혔잖아...
나는 기연가미연가 했지만 입은 열지 않았잖아.
당신이 웃음을 못 참아서 그런거지.
그리고 내가 감은 잡았다해도 어떻게 함부로 표현을 하냐?
당신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데...
그리고 당신이 마라톤 춘천 얘기 할 때 너무 노골적으로 적은게 탄로나게 한거지.
그래도 또 모른척 해줄 수도 있었는데
편지를 너무 비약해서 쓰고 어제 전화를 걸어 웃고...한게 탈이지.
세상에 어떤 여자가 그리 헤프냐?
편지 서너 번만에 사랑한다느니 어쩐다느니...
결론적으로 당신이 보다 천천히...은근하게 편지를 썼으면 좀 길게 갔을지도 모르지.
하긴 내가 그런 편지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여유도 없었겠지만.

참,
그리고 만일 일년후에 내가 당신 만나잔다고 나갔어봐라...
당신은 반갑고 재밌다고 할 지 모르지만 그건 지금 생각이고
실제로는 아마 죽인다고 펄펄 뛰었을 걸?
어쨌든
당신이 잠깐이라도 즐거웠다니 나도 기분이 좋고
앞으로도 그런 기분으로 살자고.
또 하나는 당신 글 솜씨가 제법이라는 사실을 발견해서 좋았고.
(단, 비약이나 너무 쉽게 감정이 보이는게 흠이지만 ^^)
차제에, 당신 글 좀 써보지 그래.
어떤 주제이든 괜찮아.
아마 즐거웠던, 보람있었던 일이 있어야 쓰지...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명작이란 모름지기 아픈 과거와 슬픈 추억을 적을 때
탄생하는 수가 더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못 쓸 것도 없잖아?
부끄러울 것도 없고...

끝으로
당신보다 나는 당신을 열 배, 백 배나 사랑한다는 사실만 알아둬.
막내 연수 말대로 무한대의 무한대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당신의 남편, 광호가


그 날 이후
우리는 종종 이메일을 주고 받습니다.
아내는 오후가 되면 근무중에 기운내라고 우스개 소리도 보내주고
때로는 사랑한다는 낯 뜨거운 얘기도 주고 받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유브 갓 메일...
이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알림 창이 뜨는군요.
아마도 아내의 편지일 것입니다.

'새로운 메일이 도착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분위기도 그렇고 하여, 사사로운 글이지만 올려봤습니다.
덕분에 작년 춘천마라톤에는 서울마라톤클럽에서 무상 제공해준 버스를 타고
아내와 아들 셋과 함께...너무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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