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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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명직 작성일12-09-18 09:17 조회825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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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고향은 가평이다.
잣두니라고도 하고 백두니(백둔리의 사투리)라고도하는 가평에 가장 골자기가 아버지 고향이다.
정말인지 몰라도 할아버지의 아버지께서 7고을 현감을 하셨단다.
할아버지 산소는 잣두니 즉 백둔리에 있는데
국민학교시절 할아버지 산소에 갈라치면 가평읍에서 하루 종일을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성년이 되어서도 하루에 한 두번 다니는 버스를 타기가 곤란해 걸어서 들어가야 했었다.
할아버지 산소가는 길은 연인산을 따라 흐르는 수려한 계곡을 타고 올라가는
신선이 놀다 갈만한 정말로 좋은 곳이다.
갈때마다 나중에 이곳에 헌집이나 하나 사야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계곡이 얼마나 깊은지 산소 가는 길 절벽위에 커다란 벌집(석청)이 달려 있었다.
아버지 말로는 그 석청은 일정시대부터 달려 있었다고 하셨다.
언젠가 석청은 없어지고 비포장 신작로는 포장이 되어 최고의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그 계곡이 지금은 펜션촌이 되어 한여름 성수기에는 발붙일 곳이 없이 변해 있다.
허름한 빈집과 텃밭을 하나 사지 못한게 두고 두고 후회 된다.
만약 그때 빈집을 사 두었다면 펜션집 하느라 고생이나 하고 있지않을까...
어느날 어머니가 아버지께 고향에 땅이 있다는데 왜 찾지 않느냐고 핀잔을 주셨고
아버지는 그길로 가평을 다녀오셔서는 정말로 땅을 찾아 오셨다.
찾아오신 땅은 가평 골자기 백둔리가 아니고 가평읍 이화리에 있는 5,000평이나되는 큰 산이었다.
산은 비탈지고 북사면이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땅이어서 산소나 모실 생각을 하였고
아버지 살아생전 포크레인을 동원해 산 중턱에 터를 잡아 가묘를 만들어 두었다가
아버지를 모시고 한평생 고생만 하신 불쌍한 어머님도 그곳에 모셨다.
나 또한 그곳에 묻힐 계획이다.
그러나 마누라는 자식들 고생시키지 말고 화장을 바라고 있다.
아직 죽음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지만 웬지 죽은 육신일 망정 내 몸을 태운다는 것에 대한 무섬증이 있다.
어쨋거나 땅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꽤 유세를 떨쳤다는 증거는 되었다.
돌아가신지 10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그 땅이 남아 있었으니...
백둔리 할아버지 벌초를 마치고 가평읍 이화리에 도착해서
벌초를 위해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 아버지 산소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파란 봉분은 없어지고 산소가 깊이 파헤쳐져 이장묘 모양이 되어 있는게 아닌가.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보니 괘씸한 산돼지놈들의 소행이었다.
산소가 워낙 깊은곳에 자리잡아 산돼지 놀이터가된 셈이다.
하긴 깊은 산중 파랗게 잘 자란 잔디가 어우러져 있으니 돼지일 망정 놀이터로 충분 했으리라.
해마다 대공원 친지에 부탁해서 호랑이 똥을 얻어다 뿌려두어 돼지의 접근을 막았으나
올해는 그렇지 못해 불효를 저지른 것이다.
예초기로 벌초를 하고는 봉분을 채우고 뗏장을 덮은 다음
술한잔 올리고 산소를 내려오는 발길이 무겁다.
돼지란 놈이 또 다시 산소를 헤집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대공원 친구에게 전화해서 호랑이 똥을 얻어다가 확실한 영역표시를 해 두어야겠다.
산소 인근에 있는 야생화 사진
추천 1
댓글목록
이장호님의 댓글
이장호 작성일
수고하셨어요.
저도 벌초할 때마다 죽으면 태워서 뿌리라고 합니다.
우리 어머님은 종가집 종손이 그런다고 싫어하신다 만은.......
멋진 사진 잘 감상했습니다.
문성재님의 댓글
문성재 작성일
도야지들이.....
아버님 산소에 놀이터로.....
깊은 산속에 선산이 있었군요
고생하셨네요.
임 인범님의 댓글
임 인범 작성일
세월따라 변해버린 이명직 선생님의 고향 땅의 사연와
부모님과 벌초에 대한 잔잔한 얘기 사진과 함께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최명일님의 댓글
최명일 작성일
전에 펜션 일 때문에 정말 자주 갔던 곳인데요.
고향이 그 쪽이군요
한자로 바꾸어 부르는 것 보다 잣두니가 더 좋은데...

